정운천,

그는 지방호족 출신으로 도규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도규가 태어나기 전 백두산 근처에서 명문은 아니더라도 호족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이제 막 국가의 틀이 형성되는 과도기적인 시절이었다. 왕은 지방이 호족들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갖고 있음을 알고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그들의 재산을 뺏앗고자 하였다. 그래서 호족들은 최대한 몸을 숙이며 왕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운천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는 왕이 살고 있는 곳과 가까운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어느 날 근처의 호족들이 반란이라는 이유로 관군들에게 잡혀들어갔을 때 그는 전화(戰禍)를 피해 한밤중 식구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운천이 선택한 곳은 관군들의 영향이 닿지 않는 연변지역으로 그곳에서 제2의 터전을 일구며 조용히 살고자 하였다.

그 때가 도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도규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가족들과 따라온 식솔 2가구만이 전부였다.

세월이 지나자 도규의 가족이 정착한 곳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여러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작은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넉넉하지는 못한 생활이었지만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서워 척박한 이곳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사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부모들은 생각했다.

굳이 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산열매와 사냥을 통해 먹을 것을 해결하였고 필요한 생필품 등은 먼 지역의 마을로 내려와 동물가죽들과 바꾸어 생활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만주의 추운 날씨 속에서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농사에 대한 열망은 마침내 그곳에 온지 3년만에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은 아무리 어려운 곳에서도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배고픔이 해결되었을 때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바로 교육에 대한 열망이었다.

비록 자기 자신들은 이미 늦었더라도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었다.

다행히 운천은 학문이 남들보다 뛰어나서 저절로 마을에서 어린 자식들을 위한 훈장이 될 수 있었다. 궁벽한 이런 촌에서 글자를 아는 이는 운천 외에는 없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훈장 외에도 시간이 날때마다 마을 사람들의 장(長)이 되어 대소사를 관장하기도 하였다.

또 다시 규모는 작았지만 이곳에서도 과거와 같이 호족이 될 수 있었다.

만일 그 때 그 일이 없었다면 도규는 아버지의 영향에 따라 벼슬을 하게 되어 출세를 한다던가 아니면 평범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어느 날이었다.

만주에서의 밤하늘은 다른 곳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어디선가 밤의 고요한 적막함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수십의 말발굽 소리였다.

이미 주위는 말발굽 소리에 진동하여 조용한 마을을 깨우고 있었다.

“크하하... 여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죽여라”

누군가의 외침에 말을 탄 장정들이 집집마다 들이닥치며 약탈과 방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몇몇은 아녀자를 대상으로 을 저지르고 남자라면 어린아이 할 것없이 모두 다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적이었다.

횟불을 든 수십 명의 마적들이 저마다의 무기들을 들고 도규의 마을을 방문해 아비규환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놈들...”

몇몇이 집에서 나와 곡괭이와 낫으로 그들을 막으려 하였지만 소용이 없는 몸짓이었다.

“으하하.. 오늘 제법 수확이 좋을 듯 싶구나”

평화롭던 마을은 순식간에 무법적인 천지가 되었다.

마적을 이끄는 두목은 칠척 거구에 커다란 도를 들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위압감을 갖기에 충분하였다.

그들은 이곳 근방에서는 악명이 자자하기로 소문이 나 벌써 몇 개의 마을이 피해를 입었는지 모를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부는 관군들에게 청하여 이들을 토벌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관군들을 피해 이곳에 온 사람들이어서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들을 막을 자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화(禍)는 도규의 집도 피해가지 못했다.

다행히 마을에서 약간 떨어져있는 산 중턱에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 피해입고 있는 와중에 약간의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도규의 어머니인 황씨는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여... 여보, 어떻게 해요.”

“어서 아이를 데리고 피해 있으시오.”

이에 운찬은 벽장에 숨겨놓았던 검을 집으며 말했다.

“어디로 피한단 말이에요. 벌써 마적들이 요 앞에까지 왔어요.”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것 같았다. 문을 열어보니 마적들이 들고 있는 횟불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길보다는 흉이 많겠구나”

운천은 오늘이 자신에게 있어 마지막임을 알 수 있었다. 주위 마을에서 이런 피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좀 더 대비하지 않음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면 부인, 도규를 데리고 어서 마루 아래로 숨어계시오. 내 어떻게 해서든 저자들의 시선을 끌어보리다. 만일 쫒아 그들이 없어진다면 그 틈에 산쪽으로 피해계시오. 절대 딴생각하지 말고... 어서 시간이 없소.”

다만 그를 바라보고 있는 처자식만이라도 어떻게 해서든 화를 피하게 하고 싶었다.

“서방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같이 도망치어요”

운천은 처자식을 데리고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허 부인, 보면 모르시오? 이미 늦었소.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천추의 한이 될 터이니 나는 걱정 말고 빨리 숨도록 하시오”

“하지만...”

“부인...”

운천은 큰소리로 말했다. 자꾸 이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아내가 답답하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도규를 생각하시오”

도규의 어머니인 황씨는 어린 자식을 바라보았다.

황씨도 알고 있었다. 지금 도망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음... 그러나 차마 그러지를 못한 것이었다.

도규는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황씨의 품에 안겨 있어 어미로써의 모성애가 남편에 대한 사랑보다 더욱 커져 있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고생시켜서 미안하오. 내세에서 만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절대 후회 없는 삶을 살게 해주겠소. 도규를 잘 부탁하오”

운천은 나지막히 속삭이며 문을 열고 마적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는 셈이었다.

황씨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마루 밑에 숨을 수 밖에 없었다. 숨기 전에 아래 마적들을 향해 떠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검은 눈동자에 담는 그녀였다.

벌써 마적들이 들고 있는 횟불의 그림자가 바로 아래쪽에서 집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달빛아래 마적들의 칼에서 핏물이 보이는 것을 보니 분노가 앞섰다. 그러면서 운천은 최대한 그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쏠리도록 하고 싶었다. 그들의 관심이 운천에게 갖도록 해야 숨어있는 처자식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 내가 곧 하늘인데 누가 무섭느냐”

마적 두목이 말하였다.

“이놈들....”

운천은 두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젊었을 때 연마했던 무술이 약간 도움이 되긴 하였다.

슈각...

“으악..”

아쉽게도 두목은 뒤로 피하였고, 그 앞에 있던 마적 하나가 다리를 베어 쓰러졌다.

“이... 이놈이”

뜻밖의 반응에 크게 놀란 두목이었다.

이에 운천은 바로 옆에 있는 마적에게로 두 번째 칼을 휘둘려고 했지만 너무 몸동작이 커서인지 그는 쇠몽둥이로 막았다.

챙...

“샌님이 제법 기개가 있군. 하지만 어리석은 짓이지... 멋들 하느냐 빨리 죽이지 않고...”

이미 두목은 마적들의 뒤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살짝 겁이 난 두목이었다.

솔직히 이런 촌구석에서 칼을 들고 부하를 살상할 사람이 있으리라곤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도망치거나 허접한 농사도구로 반항하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전문적으로 칼을 쓰는 이는 운천이 처음이었다.

“오냐, 너만은 내가 꼭 저승으로 같이 데리고 가마...”

그 소리에 더욱 두려워진 두목이었다.

“저놈을 죽이는 자에게는 금 한 냥을 주마.”

그 소리가 운천의 칼부림에 마적들의 떨어진 사기는 금새 회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운천을 향해 둘러 쌓으며 틈을 노리고 있었다.

비록 운천이 마적 개개인보다 칼쓰는 솜씨가 뛰어나다 할 지라도 한 손이 열 손 못막기는 힘들어 보였다.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윽...”

화끈한 느낌이 났다.

어느 마적의 칼날이 운천의 등을 스쳐지나가게 되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칼을 지팡이 삼아 땅에 주저앉았다.

“헉 헉... 이놈들...”

숨은 끊어질 듯 목구멍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칼에 베인 느낌은 어느새 무감각해져 가는 것이 점차 마적들의 모습 또한 흐릿해져 갔다. 자신의 끝이 보이는 듯 하였다.

“내 죽어서라도 귀신이 되어 니놈들을....”

마지막으로 운천의 뒤에서 마적 하나가 그의 목을 베었고 그렇게 그는 천천히 차가운 대지에 쓰러지게 되었다.

쓰러지는 와중에 몇 년간 살았던 집을 다시 한번 보는 그였다. 순간 그의 뇌리속에는 그동안 있었던 일생의 추억들이 한순간에 지나가고 있었고 숨어있는 아내와 그의 자식이 무사하기만을 기원하고 있었다.

“이런... 오늘 완전 똥 밟았네.”

그러면서 두목은 화풀이라도 하듯이 운천의 몸을 더욱 난도질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부하 두 명이 큰 부상을 입어 득보다는 실이 많은 날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뭣들 하느냐. 보아하니 이집 계집이 괜찮다고 하던데 빨리 찾지 않고...”

이미 마적들은 어느 정도 도규의 집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두목은 다른 곳보다 이곳을 더욱 신경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루 밑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씨는 어린 아들을 보며 말하였다. 차라리 남편이 싸우고 있을 때 도망칠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집에서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차마 그러지를 못하고 있었다.

“도규야 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숨어있다가 엄마가 안오면 날이 밝거들랑 이웃 마을로 내려가도록 해라. 저쪽 큰 나무쪽으로 이틀 정도 가다보면 마을이 나올테니...”

황씨는 마적들이 집을 살피게 된다면 분명 발각되리라 생각했다. 그렀다면 차라리 자신이 미끼가 되어 이곳을 떠나 산쪽으로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남자라면 어린아이 할 것없이 무지막지하게 죽인다는 그들에게 살려달라는 선처를 베풀어달라는 것은 범의 아가리에 손을 넣는 짓이었다.

“알았지? 애미는 최대한 다른 곳에 숨어있다가 마적들이 도망치면 그 때올테니... 알았지?”

다시 온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이 있기에 지금이 마지막으로 도규를 보는 날이었다.

어린 도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저 어미인 황씨가 자신을 떠나려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엄마...”

도규는 울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황씨를 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황씨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소한 정은 어린 도규를 더욱 위험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울지 않는단다. 꼭 엄마를 위해 살아남아... 만약에... 만약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넌 절대 복수는 생각지 말고 행복하게 지내야 한단다. 약속할 수 있지?”

“흑 흑...”

황씨는 그러면서도 이 어린 자식이 혹여 부모의 복수를 위해 위험한 일을 저지를까봐 그것이 염려가 되어 말을 하였다.

“꼭 엄마하고 약속해야 돼... 알았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도규였다.

황씨는 이런 도규를 꼭 안아주고는 서둘러 마루에서 나와 뒤쪽에 있는 산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산 중턱에 그녀가 생각해둔 곳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호라, 거기 있었느냐... 아녀자의 몸으로 빨리도 뛰는 구나.”

마적들이 보이도록 도망쳐서 그녀는 금방 그들에게 발각 당했다.

“에구.. 살살 뛰려무나. 그러다가 고운 피부가 상할라... 흐흐”

마적들의 말대로 그녀는 이미 신발을 잊어버려 발에서는 나무가시에 긁힌 상처 때문에 피가 나기 시작했지만 개이치 않았다. 그저 어린 자식을 떼놓고 가야 하는 심정만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을 뿐이었다.

“헉 헉..”

자꾸만 긴 치마가 그녀의 뜀걸음을 더디게 만들고 있었고 그 때문에 마적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황씨의 얼굴을 때리고 돌부리에 넘어져 쓰러지기도 하였지만 그녀는 계속 뛰어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곳까지 최대한 가까이 가는 일이었다.

이런 현실을 만들어준 하늘이 그토록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뒤에서 가까이 쫒아오는 마적들 때문에 그런 감정쯤은 사치에 불과했다.

마적들과의 거리가 30자(9미터)정도 남았을 때 그녀는 멈춰서서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휴...”

가슴은 터질듯이 힘들었지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가 오고자 하는 곳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산 중턱에 있는 낭떨어지였다.

“그러게 진작에 포기했으면 서로가 편하잖아”

아직 그녀의 뒤쪽이 낭떨어지라는 것을 모르는 한 마적이 희죽거렸다. 어둠은 다행히 그녀 편이었다.

‘한놈이라도 같이 데리고 가마.’

황씨는 원독의 눈빛을 그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더불어 저 멀리 보이는 집을 힐끗 쳐다보았다. 마지막으로 아들의 모습을 한번 더 보고 싶었지만 그저 생각속 자식의 모습만이 그녀의 눈속으로 들어왔다.

“잘 대해주지. 이리와 응? 듣던데로 어여쁘기 그지 없구나. 흐 흐”

마적 두목은 황씨의 미모에 저절로 입맛을 다시며 다가가기 시작했다. 곧 있을 그녀와의 질펀한 놀이가 저절로 그의 몸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오냐,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황씨는 기다렸다.

“에잇...”

이윽고 거의 두목에게 잡혔을 때 그를 껴안았다.

“어 어...”

그리고 그대로 두목과 함께 낭떨어지에 몸을 던지는 황씨였다.

“으아악...”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마적들은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깨어난 마적들은 이쯤에서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가야 했다.

“에잇... 돌아가자.”

마적들중 두목 다음으로 힘이 쎈 자가 말하였다. 본거지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가 새로운 두목이 될 것이다.

어두운 낭떨어어지는 무저갱처럼 그 끝이 아무것도 안보였다.

‘에잉.. 오늘은 액땜 제대로 했구만. 그래도 괜찮았어. 두목이 죽었으니 말이야. 흐흐’

곧 두목이 될 것이 기쁜 마적은 애써 본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마적들의 의리라든지 윤리 의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조아라'에서 연재중